오타 미노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타 미노루는 1891년 지바현 출신으로, 일본 해군 군인이다. 1913년 해군병학교 졸업 후 여러 함선에서 근무했으며, 1938년 중일 전쟁, 1941년에는 중국 방면 함대 산하 특별 해군 육전대 지휘관을 역임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드웨이 점령을 목표로 하는 부대를 지휘했으나,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중 소장으로 진급, 뉴조지아섬 전투에 참전했으며,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군 근거지대 사령관으로서 약 1만 명의 부대를 지휘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에 포위된 후 자결했으며, 사후 해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그는 오키나와 현민을 옹호하는 내용의 전보를 남겼으며, 그의 가족과 관련된 논란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군인 - 소 도신
소 도신은 1911년 일본에서 태어나 만주와 중국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소림사 의화문권 법맥을 계승하여 소림사 권법을 창시했으며, 민족 의식과 조국애를 강조하며 새로운 인간을 육성하려 했다. - 일본의 군인 - 조선적 일본군인
조선적 일본군인은 일제강점기 특별지원병 제도와 징병제를 통해 일본군에 동원된 한국인들을 지칭하며, 차별 대우, 사망, 야스쿠니 신사 합사, 친일 논란 등 해방 이후 과거사 청산의 주요 문제로 다루어졌다. - 오키나와 전투 - 오에 겐자부로
일본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가진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개인적 고뇌와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결합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평화주의 및 반핵 운동에도 참여했다. - 오키나와 전투 - 야하라 히로미치
야하라 히로미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참모로서 지구전을 지휘하여 미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 1945년 자살 - 요제프 괴벨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선전 능력으로 나치당의 권력 장악에 기여하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서 독일의 문화와 언론을 통제하며 전쟁 선동에 앞장섰으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평가받고 베를린 함락 직전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 1945년 자살 - 하인리히 힘러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친위대 사령관으로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하여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으며, 1945년 연합군에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오타 미노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오타 미노루 (大田 実) |
출생 | 1891년 4월 7일 |
출생지 | 지바현 나가라 |
사망 | 1945년 6월 13일 |
사망지 | 오키나와현 |
소속 | 대일본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13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사후 추서) |
주요 전투 | |
참전 | 상하이 사변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오키나와 전투 |
2. 생애
오타 미노루는 1891년 4월 7일 지바현 나가라에서 태어나 1913년 일본 해군병학교를 졸업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육전대를 지휘했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등 주요 전쟁에 참전했다.
해군 내에서 오타는 육전(상륙작전)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 제5대대장으로 참전했고, 2·26 사건에서는 육전대 대대장으로 도쿄로 출동하기도 했다.[11] 중일 전쟁 발발 이후 1939년에는 구레 진수부 제6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하이난섬 점령 작전에 참가하여 싼야를 점령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1942년 제2연합 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섬 상륙 부대의 해군 지휘관을 맡았으나,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1943년에는 뉴조지아섬 문다의 수비를 맡았지만, 뉴조지아섬 전투에서 고전하여 콜롬방가라섬으로 철수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해군 최고 선임자로서 오키나와 근거지대 사령관을 맡아 약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 오로쿠 반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육군의 슈리에서 마보니로의 철수 과정에서 해군 사령부는 작전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고, 5월 24일경에야 철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타는 처음에는 철수 명령을 오해하여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곧 제32군 사령부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5월 28일 오로쿠로 복귀했다. 6월 2일 다시 철수 명령이 내려졌지만, 오타는 따르지 않았다.
미군의 공격으로 사령부가 고립되자, 6월 13일 오타는 도미구스쿠에 있던 해군호 안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후 해군 중장으로 특별 승진했다. 오타는 자결 직전, 오키나와 현민들의 희생에 대해 후세의 특별한 배려를 부탁하는 전문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타 미노루는 1891년 4월 7일 지바현 나가라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일본 해군병학교 제41기를 118명 중 64등으로 졸업했다. 동기생으로는 구사카 류노스케, 기무라 마사후쿠, 다나카 요리미쓰 등이 있다. 졸업 후 사관후보생으로 순양함 아즈마에 탑승하여 호놀룰루, 샌페드로,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빅토리아, 타코마, 시애틀, 하코다테, 아오모리를 순방하는 원양 훈련 항해에 참여했다.[2]일본으로 귀환한 후, 전함 가와치에 배속되었고,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전함 후소에 배치되었다. 1916년 중위로 진급한 후 해군 포술학교로 돌아갔지만, 결핵으로 인해 1917년 11월부터 1918년 9월까지 1년간 현역 복무를 중단해야 했다.[2] 현역 복귀 후에는 해군 수뢰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해군 포술 고급 과정을 마쳤다. 전함 히에이와 후소에서 잠시 복무한 후, 해군 기술학교의 교관으로 복귀했다.[2]
오타는 구제 지바현립 지바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군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제25기)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했다. 해군병학교 41기에 입교했다. 석차는 입교 시 120명 중 53등, 졸업 시 118명 중 64등이었다.
다음은 오타 미노루의 초기 생애 및 교육 관련 연표이다.
연도 | 사건 |
---|---|
1891년 | 지바현나가세군나가라정 출생 |
1905년 | 4월 1일 지바 현립 지바 중학교 입학 |
1910년 | 3월 31일 지바 현립 지바 중학교 졸업, 9월 12일 해군병학교 입교 |
1913년 | 12월 19일 해군병학교 졸업, 소위 후보생·장갑순양함 아즈마 승무 |
1914년 | 4월 20일 연습함대 원양 항해 출발 (호놀룰루~샌페드로~샌프란시스코~밴쿠버~빅토리아~타코마~시애틀~하코다테~아오모리 방면 순항), 8월 11일 귀착, 8월 15일 전함 가와치 승무, 12월 1일 해군 소위 임명 |
1915년 | 6월 30일 공무 부상으로 대기, 10월 27일 전함 후소 승무 |
1916년 | 12월 1일 해군 중위 임명·해군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
1917년 | 11월 14일 폐결핵 요양으로 대기 |
1918년 | 9월 20일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12월 1일 해군 수뢰학교 보통과 학생 |
1919년 | 5월 23일 해군 포술학교 보통과 재입학, 12월 1일 사세보 해병단 분대장 직무 대리 |
1920년 | 7월 1일 겸 교관 직무 대리, 12월 1일 해군 대위 임명·해군 포술학교 고등과 제20기 학생 |
1921년 | 11월 29일 해군 포술학교 고등과 졸업, 12월 1일 순양전함 히에이 분대장 |
1923년 | 8월 13일 전함 후소 분대장 |
1924년 | 12월 1일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
1925년 | 12월 1일 해군 포술학교 교관 겸 해군 기관학교 교관 |
2. 2. 해군 경력
오타는 1913년 일본 해군병학교 제41기를 졸업했다. 졸업 후 사관후보생으로 순양함에 탑승하여 호놀룰루,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샌피드로, 샌프란시스코 등 북미 지역을 순방하는 원양 훈련 항해에 참여했다.[2] 귀국 후 전함에 배속되었고, 소위 임관 후에는 전함에 배치되었다.[2] 1916년 중위로 진급한 후 해군 포술학교에 복귀했지만, 결핵으로 인해 1년간 현역 복무를 중단해야 했다.[2] 현역 복귀 후 어뢰 학교 과정과 해군 포술 고급 과정을 마치고, 전함과 ''Fusō''에서 잠시 복무한 후 해군 기술학교의 교관으로 복귀했다.[2]오타는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육전대 1개 대대를 지휘하며 특별 해군 육전대(SNLF) 경험을 쌓았다.[2] 1934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1936년에는 전함의 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에는 유조선 ''Tsurumi''의 지휘를 맡으며 처음으로 지휘관이 되었다.[2] 같은 해 12월 대령으로 진급했다.[2]
중일 전쟁에서는 1939년 2월 구레 진수부 제6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하이난섬 점령 작전에 참가하여 싼야를 점령했다. 4월에는 부대가 제6방비대로 개편되어 제6방비대 사령이 되었지만, 같은 달 내지로 귀환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1942년 5월 제2연합 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섬 상륙 부대의 해군 지휘관이 되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상륙 작전은 중지되었고, 6월에 부대는 해산되었다.
1943년 2월, 제8연합 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뉴조지아섬 문다의 수비를 맡았지만, 뉴조지아섬 전투에서 고전하여 8월에 콜롬방가라섬으로 철수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해군 최고 선임자로서 오키나와 근거지대 사령관을 맡아 약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오로쿠 반도에서의 전투를 지휘했다. 6월 2일 "마보니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오타는 따르지 않았다. 미군에 의해 퇴로가 끊겨 철수할 수 없었는지, 의도적으로 명령을 무시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미군의 공격으로 사령부는 고립되었고, 6월 13일 오타는 해군호 안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후 해군 중장으로 특별 승진했다.
2. 3. 중일 전쟁
1939년 2월, 구레 진수부 제6특별 육전대 사령으로서 중일 전쟁의 하이난섬 점령 작전에 참가하여 싼야를 점령했다.[3] 4월에는 부대가 제6방비대로 개편되어 제6방비대 사령이 되었지만, 같은 달 내지로 귀환했다.2. 4. 태평양 전쟁
1938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오타는 구레 제6 특별 해군 육전대(SNLF)를 지휘하였다. 1941년에는 중국 우한에 주둔한 일본 중국 방면 함대 산하의 특별 해군 육전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일본으로 귀국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해군을 상대로 일본이 승리할 경우 미드웨이 점령을 목표로 하는 제2 연합 특별 해군 육전대를 지휘하게 되었다.[3] 이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뉴 조지아에서 미국의 제1 특공대대를 상대로 제8 연합 특별 해군 육전대를 지휘했다.[4] 이후 1945년 1월까지 여러 행정직을 수행하다가, 오키나와로 재배치되어 연합군의 예상된 침공에 대비하여 일본 해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5][6]오키나와에서 오타는 표면상 10,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들 중 절반은 최소한의 훈련만 받은 채 징집된 민간 노동자였고, 나머지는 육상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해군 함정의 포병이었다. 연합군 측은 오키나와 해군 지휘관으로서 그의 역할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오타가 해군 병력을 조직하고 이끌어 효과적인 부대로 만들었으며, 연합군에 맞서 "요새화된 오로쿠 반도로 천천히 후퇴"하며 적극적으로 싸웠다고 언급한다.[7]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 시작부터 외곽 섬들을 제외한 해군 부대는 오로쿠 반도에 주둔해 있었다.[8] 일본 제32군 작전참모 히로미치 야하라 대령은 오타의 해군 부대가 남쪽으로 후퇴하여 육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에 오해가 있었다고 묘사한다.[8]
실제 벌어진 일은 명확하다. 오타는 5월 24일경부터 해군 부대의 남쪽 후퇴를 준비하여 육군을 지원했다. 그는 대부분의 중장비, 탄약, 심지어 개인 무기까지 파괴했다. 32군 사령부는 3월 중순에 오타에게 오로쿠 반도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시기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었다(설명은 다양하다). 해군 부대는 중무기 없이, 병력의 절반가량이 소총도 없이 이전 위치로 돌아갔다. 처음의 철수를 눈치채지 못한 미국군은 북쪽 육지에서의 공격과 해군 진지 뒤에서의 마지막 상륙으로 반도를 포위했다. 해군 부대는 가능한 모든 무기로 자결했으며, 일부는 동굴 입구에서 마지막 돌격을 이끌었다. 오키나와의 지하 해군 사령부 박물관에 따르면, 오타를 포함하여 "많은 병사들이" 지휘 벙커 안에서 자결했다.[9]
6월 6일, 지휘관 오타는 해군 중장에게 전보를 보냈다.[10] 1945년 6월 11일, 미국 제6 해병 사단이 오타의 진지를 포위했고, 오타는 6월 12일 16:00에 일본 제32군 사령부에 작별 전보를 보냈다. 6월 13일, 오타는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는 사후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타는 해군 최고 선임자로서 오키나와 근거지대 사령관을 맡아, 미군 상륙 시에 약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오로쿠 반도에서의 전투를 지휘했다. 육군의 슈리에서 마보니로의 철수 과정에서 해군 사령부는 작전 회의에 불려가지 않았고, 1945년 5월 24일경 (이설 있음)에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타는 일단 완전 철수로 받아들여 중화기를 파괴하고 남부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이후 "제32군 사령부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오해했음을 인지하고 5월 28일에 다시 오로쿠로 복귀했다. 6월 2일에 다시 "마보니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오타는 이번에는 따르지 않았다. 명령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는지, 미군에 의해 퇴로가 끊겨 철수할 수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키나와에서의 해군 부대의 싸움은 미국 공표 전사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미군의 공격으로 사령부는 고립되었고, 6월 13일, 오타는 도미구스쿠에 있던 해군호 안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후 해군 중장으로 특별 승진했다.
- 유언: ''대군의 깃발 아래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으리''
오타는 오키나와 현민의 실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전문을 남겼다. 이는 현 지사가 보고해야 할 사항이지만, 현은 이미 통신 수단을 잃었고, 제32군 사령부 또한 그런 여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현 지사로부터 해군 사령부 앞으로 의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을 간과할 수 없어 지사를 대신하여 긴급히 알리는 내용이었다.
오키나와 본섬에 적이 공격을 시작한 이후, 육해군은 방어전에 전념하여 현민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현민은 청년·장년이 모두 빠짐없이 방위 징집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남겨진 노인·어린이·여성은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자, 자신들끼리, 게다가 잇따른 적의 포격에 집과 재산을 전부 잃고 옷만 걸친 채,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좁은 방공호에 피난하여, 간신히 포격을 피하면서도 비바람에 노출된 채 궁핍한 생활을 견디고 있다.
게다가 젊은 여성은 솔선하여 군에 몸을 바쳐, 간호부나 취사부는 물론, 포탄 운반, 정신 돌격대에까지 자원하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적이 오면, 노인과 어린이는 살해당할 것이고, 여자는 적의 영토로 끌려가 독한 짓을 당할 것이라며, 살아 있는 채로 이별을 결심하고, 딸을 군영 문 앞에 버리는 부모도 있다.
간호부에 이르러서는, 군의 이동 시 위생병이 버리고 간 의지할 데 없는 중상자의 간호를 계속하고 있다. 그 모습은 매우 진지하여, 잠시의 감정에 휩쓸린 것만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욱이, 군의 작전이 크게 바뀌면, 그날 밤 안에 훨씬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송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불평도 하지 않고 비 속을 걸어 이동하고 있다.
요컨대, 육해군 부대가 오키나와에 진주한 이후, 시종일관 근로 봉사와 물자 절약을 강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 악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묵묵히 일본인으로서의 봉사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결국‥‥ 주는 일 없이, 오키나와 섬은 이 전투의 결말과 운명을 함께 하여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정도의 초토가 되려 하고 있다.
식량은 이제 6월 말까지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오키나와 현민은 이처럼 싸웠다.'''
'''현민에 대해, 후세에 특별한 배려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타 미노루는 오키나와 근거지대 사령관으로서, 미군 상륙 시 약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 오로쿠 반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이 병력의 절반은 훈련이 부족한 민간인 징집병이었고, 나머지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해군 함정의 포병이었다.[7]
일본 제32군이 슈리에서 마보니로 철수할 때, 해군 사령부는 작전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고, 1945년 5월 24일경에야 철수 사실을 통보받았다. 오타는 중화기를 파괴하고 남쪽으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제32군 사령부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오해했음을 알고 5월 28일에 다시 오로쿠로 복귀했다. 6월 2일, 다시 "마보니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오타는 따르지 않았다. 미군에 의해 퇴로가 끊겨 철수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명령을 무시했는지는 불분명하다.[11]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 "최후"에서 자세히 다룬다.
오타는 오키나와 현민들의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문을 남겼다.[10]
오키나와 현민은 적의 공격 이후 육군과 해군이 방어전에 전념하면서도, 젊은이와 노인 모두 방위 소집에 지원하는 등 헌신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군사 작전으로 인해 집과 재산을 잃고 피난 생활을 하며, 심지어 젊은 여성들은 간호와 포탄 운반 등에 자원하는 등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군대가 이동하면서 중상자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버려졌으며, 식량은 6월에 이미 고갈될 상황이었습니다. 오키나와 현민의 이러한 희생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3. 1. 지휘
오타는 1938년 중일 전쟁 당시 구레 제6 특별 해군 육전대(SNLF)를 지휘했다.[3] 1941년에는 중국 우한에 주둔한 일본 중국 방면 함대 산하 특별 해군 육전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 1942년에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할 경우 미드웨이 점령을 목표로 하는 제2 연합 특별 해군 육전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나,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3]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뉴 조지아에서 미국의 제1 특공대대를 상대로 제8 연합 특별 해군 육전대를 지휘했다.[4]중일 전쟁에서 오타는 1939년 2월 구레 진수부 제6특별 육전대 사령으로서 하이난섬 점령 작전에 참가하여 싼야를 점령했고, 4월에는 부대가 제6방비대로 개편되어 제6방비대 사령이 되었지만, 같은 달 내지로 귀환했다.[11]
태평양 전쟁에서 오타는 1942년 5월 제2연합 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섬 상륙 부대의 해군 지휘관이 되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상륙 작전은 중지되었고, 6월에 부대는 해산되었다.[11]
1943년 2월, 오타는 제8연합 특별 육전대 사령관으로서 뉴조지아섬의 문다 수비를 맡았지만, 7월부터 시작된 뉴조지아섬 전투에서 고전하여 8월에 콜롬방가라섬으로 철수했다.[11]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타는 해군 최고 선임자로서 오키나와 근거지대 사령관을 맡아, 약 1만 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섬오로쿠 반도에서의 전투를 지휘했다.[11]
3. 2. 최후
오타는 오키나와에서 표면상 10,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지만, 실제로는 절반은 최소한의 훈련만 받은 민간 노동자였고 나머지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해군 포병이었다.[7] 연합군은 오타의 역할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는데, 어떤 자료에는 오타가 해군 병력을 효과적으로 이끌고 적극적으로 싸웠다고 언급되어 있다.[7] 그러나 실제로는 오키나와 전투 시작부터 해군 부대는 오로쿠 반도에 주둔해 있었고,[8] 오타는 1945년 5월 24일경부터 남쪽으로 후퇴를 준비했지만, 중장비와 탄약, 개인 무기까지 파괴한 상태였다.[8] 일본 제32군 사령부는 3월 중순에 오타에게 오로쿠 반도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시기에 오류가 있었고, 해군 부대는 중무기 없이 병력의 절반가량이 소총도 없이 이전 위치로 돌아갔다.[8] 결국 미군은 북쪽 육지와 해군 진지 뒤에서의 상륙으로 반도를 포위했고, 해군 부대는 자결하거나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다.[9]1945년 6월 6일, 오타는 해군 중장에게 전보를 보냈고,[10] 6월 11일 미국 제6 해병 사단이 오타의 진지를 포위하자 6월 12일 16:00에 일본 제32군 사령부에 작별 전보를 보냈다. 1945년 6월 13일, 오타는 권총으로 자결했고, 사후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4. 오키나와 현민에게 보낸 전문
1945년 6월 6일,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패배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오타 미노루는 해군 차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은 오키나와 현민들이 겪는 고통과 헌신을 알리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타 미노루는 전문에서 오키나와 현민들이 일본군과 함께 싸우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세히 묘사했다. 특히 젊은 남성들은 방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여성들은 간호, 취사, 탄약 운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피난처마저 폭격당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또한, 적군에게 점령당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두려워하여 어린 딸을 군에 맡기는 부모들도 있었다.
오타 미노루는 이러한 상황을 전달하며, 오키나와 현민들이 일본인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부족하고 섬 전체가 황폐화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전문을 통해 오키나와 현민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4. 1. 전문 내용
오타 미노루가 1945년 6월 6일 오후 8시 16분, 자결 직전에 다다 타케오 해군 차관에게 발신한 전보는 널리 알려져 있다.[14] 오키나와 군사령관은 해군성 차관에게 보내는 이 전보에서 오키나와 현민들의 용감한 투쟁과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특별한 배려를 요청했다. 당시 결별 전보의 상투어였던 "천황 폐하 만세", "황국의 번영을 기원한다" 등의 말은 없고, 오로지 오키나와 현민의 현실을 호소하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14]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판독 불가 부분 있음)
> 오키나와 현민의 실상에 관해서는 현 지사가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청은 이미 통신 수단을 잃었고, 제32군 사령부도 여유로운 통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현 지사로부터 해군 본부에 요청받은 것은 아니지만, 제가 지사를 대신하여 상황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해군과 육군은 적군이 오키나와 본섬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 방어전에 전념하느라 현민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 그러나 제가 파악한 바로는, 젊고 중장년층 남성은 모두 방어 소집에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노인, 어린이, 그리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여성들은 식량 부족과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지품, 거처, 가재도구를 잃은 후 군사 작전에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지역에 파놓은 작은 방공호에 숨었으나, 이 방공호마저 폭격을 받으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어려움 속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군대에 헌신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간호사와 조리사로 활동했으며, 심지어 포탄을 나르거나 칼을 휘두르는 공격 부대에서 복무하겠다고 자원하기도 했습니다.
> 지역 주민들은 적군이 상륙할 경우 끔찍한 결과를 예상합니다. 노인과 아이들은 살해당하고, 여성들은 적의 영토로 끌려가 악한 목적으로 이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부모들은 어린 딸들을 군사 기지 입구에 맡겨 딸들을 군사적으로 보호받게 하려 했습니다.
> 저는 또한 젊은 여성 지역 간호사들의 헌신을 덧붙여야 합니다. 그들은 군대의 이동 이후에도 남아 있는 중상을 입은 병사들을 돕고 있으며, 더 이상 의료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 간호사들의 헌신은 매우 진지하며, 일시적인 동정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더욱이, 군사 전략의 갑작스럽고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러한 민간인들이 야간에 단기간 내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야 할 때, 운송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불평 없이 저녁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 요약하자면, 일본 해군과 육군이 오키나와에 전선을 구축한 이후, 지속적인 과중한 노동과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부 좋지 않은 소문이 있지만) 지역 주민들은 일본인으로서 충성스럽게 (판독 불가) 헌신했습니다. (판독 불가) 오키나와 섬은 단 하나의 식물도 타지 않고 남지 않을 불모지가 될 것입니다.
> 식량은 6월 말까지밖에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런 식으로 싸웠습니다. 저는 앞으로 귀하께서 현민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4. 2. 역사적 의의
오타 미노루는 1945년 6월 6일 오후 8시 16분, 자결 직전에 다다 타케오 해군 차관에게 오키나와 현민의 용감한 투쟁과 비참한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14] 이 전보는 "천황 폐하 만세"나 "황국의 번영을 기원한다"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 없이, 오로지 오키나와 현민들의 헌신과 희생을 호소하고 있어 널리 알려져 있다.전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키나와 현은 통신 수단을 잃었고, 제32군 사령부도 통신 여력이 없어 현 지사를 대신해 상황을 보고한다.
- 적군 공격 이후 해군과 육군은 방어전에 전념하느라 현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 젊은 남성들은 방위 소집에 적극 응했고, 노인, 어린이, 여성들은 식량 부족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 모든 소지품과 거처를 잃은 현민들은 작은 방공호에 숨었으나, 이마저도 폭격으로 도망쳐야 했다.
- 젊은 여성들은 간호사와 조리사로 헌신하고, 포탄 운반, 공격 부대 복무까지 자원했다.
- 주민들은 적군 상륙 시 예상되는 끔찍한 결과(노인과 아이 살해, 여성 납치) 때문에 딸을 군에 맡기기도 했다.
- 군 이동 후에도 남은 중상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헌신은 매우 진지하다.
- 군사 전략 변화로 야간 이동 시, 운송 수단 없는 사람들이 불평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인으로서 충성을 다했으나, 섬은 불모지가 될 것이다.
- 식량은 6월 말까지밖에 충분하지 않다.
오타 미노루는 이러한 오키나와 현민들의 희생을 강조하며, 앞으로 현민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간곡히 부탁했다.
5. 사후 평가 및 논란
오타 미노루는 책임감이 강하고 타인을 비방하지 않는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군의 깃발 아래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으리"라는 유언을 남겼다.[12]
오타 미노루의 자녀로는 사회과 교사이자 평화 운동가인 장남 오타 히데오, 자위대의 페르시아 만 파견 당시 지휘관이었던 셋째 아들 오치아이 오사무 1등 해좌(당시), 넷째 아들 오타 유타카 1등 해좌 등이 있다. 오타의 딸 중 한 명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과 싸운 일본군 간부의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도 했다.[12]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현 지사였던 시마다 아키라와 오타 미노루는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다. 오타는 마지막 전문에서 오키나와 현민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는 역할은 군인이 아닌 오키나와현청의 몫이지만, 통신 수단이 없어 자신이 대신한다는 뜻을 밝혔다.[13]
5. 1. 평가
오타 미노루는 온화하고 포용력이 있으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비방하는 언행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대군의 깃발 아래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으리"라는 유언을 남겼다.[12]오타 미노루는 11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에는 사회과 교사이자 평화 운동가인 장남 오타 히데오, 자위대 페르시아 만 파견 당시 지휘관이었던 셋째 아들 오치아이 오사무 1등 해좌(당시), 넷째 아들 오타 유타카 1등 해좌, 퍼펙트 리버티 교단 (PL)의 교교장인 셋째 딸 이타가키 아이코 등이 있다. 오타는 장남이 해군 대장이 되기를 바라며 "히데오"라고 이름 지었지만, 셋째 아들에게는 농업을 하여 집을 지켜주기를 바라 "오사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종전 후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12]
오타 미노루의 딸 중 한 명은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을 괴롭힌 일본군 간부의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훗날 오부치 게이조 수상이 위로하자, 그녀는 "아버지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며 울었다고 한다.[12]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현 지사였던 시마다 아키라와 오타 미노루는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였다. 오타가 마지막으로 남긴 전문에서, 오키나와 현민의 참상을 전하는 역할은 군인이 아닌 오키나와현청의 몫이지만, 통신 능력이 없어 자신이 대신한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된다.[13]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Materials of IJN (Naval Academy class 41)
https://archive.toda[...]
2008-11-10
[3]
서적
Miracle at Midway
[4]
서적
Storm Landings
[5]
서적
Operation Iceberg
[6]
서적
The Pacific War: Campaigns of World War II
[7]
서적
The Battle of Okinawa
[8]
서적
The Battle for Okinawa
[9]
웹사이트
壕について ≪公式≫ 旧海軍司令部壕 (海軍壕公園)
http://kaigungou.ocv[...]
2010-11-30
[10]
문서
http://kaigungou.ocv[...]
2022-03
[11]
서적
沖縄県民斯ク戦ヘリ
[12]
뉴스
東京新聞
2000-07-24
[13]
서적
昭和の遺書53通
文藝春秋
2009-01
[14]
웹사이트
Minoru Ōta
[15]
서적
Okinawasenka no nichibei interijensu.
https://www.worldcat[...]
Shiho shuppan
2014-05
[16]
문서
남서제도 방면 전보철 (쇼와 20.6) p.8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